image_thumb3유교의 시조인 공자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나이가 40세 중반을 넘은 지금도 저는 아직 삶의 진리나 의미가 무엇인지 조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서로 소통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과 상황을 전하고 내 생각을 알리는 일이 바로 소통입니다. 소통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답답함을 느끼고 그 감정을 때로 분노의 감정으로 폭발하기도 합니다.

제가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첫 아이와 둘째 아이를 낳을 때 아니 낳기 전, 아이는 뱃속에서 탯줄이라는 선으로 엄마와 서로 소통하며 생명을 키웠습니다.

소통은 영어로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고 표현합니다. 쌍방간의 의사소통이란 뜻이지요. 갓 태어난 아가들은 탯줄을 끊은 다음에는 호흡과 눈빛으로 엄마와 소통을 하며 비로소 세상에 그 작은 첫 걸음을 내딛습니다.

만약 사람들과 말이 통하지 않고 아니 말을 하고 싶은 상대조차 없다면 그처럼 사는 동안 답답한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내 얘기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정말 살기 좋은 행복으로 넘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작금의 세상은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고 가팔라서 그 끝을 알 수 없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처음 병원에 근무를 시작한 80년대 초만 해도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삐삐’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에게 유선전화를 통해 연락처를 남기고 답신을 기다리던 삐삐는 기다림과 여백의 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즉문즉답의 핸드폰 시대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 전지전능한 스마트폰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려보면 지금의 남편과 연애할 때에도 유선전화를 몇 번이고 걸면서 따르릉 소리에 설레거나 ‘삐삐’를 만지작거리던 일이 한편의 영화처럼 뇌리를 스칩니다.

세계는 진화하고 세상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변화합니다. 산다는 것이 가끔은 바닷가의 해일처럼 내게로 와 부딪치고 포말처럼 산산이 흩어지기도 합니다.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지만 소통이 안될 때의 세상은 전기가 나간 암흑세상(BLACK OUT)이 된 것처럼 캄캄하고 어둡습니다. 아니, 답답하기는 그 이상이 됩니다.

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이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부모와 자식, 남자와 여자, 선생님과 제자, 의사와 환자 등 그 어떤 사이에서도 말이 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그런 일이 다반사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나의 일’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낍니다.

언젠가, 연세가 많으신 할아버지께 상담을 해드렸습니다. 이 할아버지께서는 진료절차를 잘 모르겠다고 안내를 부탁하셔서 동행을 해드렸더니 우리병원에 오실 때마다 고맙다며 안부를 잊지 않고 전해주십니다. 어르신과 정말 행복한 소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에 아픈 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요? 아픈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알맞게 의사와 연결해주는 나의 일은 때론 힘들지만, 큰 보람을 갖게 합니다.

병원에는 생로병사가 있습니다. 태어남이 있고, 처녀시절부터 일해 중년을 훌쩍 넘은 나의 삶이 묻어 있고,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 이전에 병들었을 때 병원은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은 희망과 같은 곳이 아닐까요?

25년의 세월, 내 꽃다운 청춘과 무정하게 흘러간 시간들이 병원의 뜰에서 피고 지는 꽃잎들처럼 지나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위해, 긴박하고 어려운 아픔에 처한 이들을 위해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이 아름다운 일을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계속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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