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했던 학창시절, 누구나 직업에 대한 꿈을 키운다. 그도 그럴 것이 직업은‘자아실현의 과정’이며 직장은 ‘자아실현의 장’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그 설레는 직업관은 희미해지기 십상이다. 관성적으로 일을 하다보면 직업에 대한 생각에도 굳은살이 생기기 때문이다.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청년같은 인상의 노신사는 자신의 일생에서 직장은 학교였으며 일은 배움의 기쁨이었다고 했다. 그의 학교는 한양대학교병원이었고 배움의 기쁨은 임상병리학이었다. 그는 김대근 진단검사의학과 전 기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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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찼던 내 직장

“1972년 5월 3일은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발령을 받은 병원 직원들과 내빈, 축하객 모두가 한양대학교병원 현관 앞에서 열린 개원식에 참석했었지요.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시설로 주목받은 한양대학교병원의 풍광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어요. 의료진도 당대의 최고 실력가들로 구성되었지요. ‘아, 이곳이 내 직장이구나!’하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2005년 2월 정년퇴임하기까지 한양대학교병원에서 보낸 34년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한양대학교병원은 내 일생에서 가장 크고 빛나는 학교였어요.”

김 전 기사장은 임상병리학을 전공하고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임상병리사로 재직했다. 출범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의료진, 최신시설과 장비를 갖추었던 한양대학교병원은 환자들이 진료 받고 싶어 하는 병원으로 정평이 높았고 VIP 환자들이 줄을 이어 찾았다고 한다. 잠시 병원의 풍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느껴지는 일터에서 그는 임상병리학 특히 미생물학, 면역 혈청학 분야의 검사전문가로 성장해갔다.

임상병리검사는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꼭 필요한 분야이고 세포, 조직, 장기에 연관된 병의 원인과 변화, 임상적 영향 등에 관한 검사와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학문이다. 진단이 정확해야 치료가 잘 되고, 환자는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적절한 치료를 받음으로써 회복된다. 초기 진단에서부터 임상의사에게 검사자료를 제공하는 임상검사업무를 위해 그는 양립하기 힘든 정확성과 신속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특유의 섬세함과 성실성을 발휘하며 노력했다.

“70~80년대 초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장기이식수술이 소수의 병원에서만 시행되었지요.우리 병원도 장기이식 수술을 위한 조직을 가동하고 팀원과 부서의 역할, 운영 등을 분담하게 되고 업무수행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 임상병리과에서는 필요한 모든 검사는 가능한데 조직적합검사가 실행되기 전이었어요. 병원의 배려로 1980년7월에 일본 이식면역학의 명문인 동해대학에 파견되어 3개월간 그곳 이식면역센터에서 HLA-ology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장기이식에 필요한 각종 검사종목을 실시할 수 있도록 연수하고 귀국했습니다. 세포면역 검사실을 신설하여 우리병원에서도 장기이식의 시대를 맞게 되고 신장이식부터 시행하는데 동참하며 큰 보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故 박승함 교수는 그에게 잊혀지지 않는 은사 같은 분이었다고 한다.

“1982년, 임상병리과 과장님이셨던 故 박승함 교수님께서 미생물 검사실의 도약이 되는 비전을 계획하시던 일이 있었습니다. 특히 소아과 환자들의 설사증과 질환들에 대해 미생물학적 검사를 잘 하셔서 그 원인 미생물을 정확히 밝혀 연구를 하시고자 한 것이지요. 그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낸 일본 동북대학병원 소아과 연구실로 제1차 연구분야인 로타바이러스에 대해 공부해 오도록 저와 전공의 선생님을 파견하셨지요. 보사부차관을 역임하셨고 국립의료원에서도 근무하신 권위 있는 임상미생물학자이셨던 교수님의 지도에 힘입어 귀국 후 바로 검사를 실시하고 결과를 임상진료부서에 통보하고 연구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고 국내에도 로타바이러스로 인한 설사가 많음이 밝혀졌죠. 허나 애석하게도 그 해 12월, 교수님께서 병환으로 타계하셨습니다. 기본적인 검사는 이후 계속 시행하였으나 전자현미경에 의한 검사나 특수검사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도 죄송스러운 생각에 하늘을 쳐다보며 상념에 잠길 때도 있습니다.”

배우고 또 가르치며 느끼는 학문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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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학교병원에 근무한 34년 동안 초기 진단검사의학분야가 개원에서부터 눈부시게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점을 참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후배들이 한양대학교병원 직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앞으로도 많은 성과를 내주길 바랍니다.”

김 전 기사장의 배움의 열정은 늘 뜨거웠다. 시간을 쪼개 서울대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학위도 받고 관련분야인 대한미생물검사학회에서 논문도 발표하며 학회장도 맡아서 했다. 지원을 아끼지 않은 병원과 의료진들의 성원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성실함의 대명사였던 그의 모습은 후배들에게 좋은 자양분이 되었을 터이다. 자신의 일에 열정적인 모습은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한양대학교병원에서 태어난 슬하의 1남1녀는 모두 아버지의 추천으로 한양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공부를 했고 공업화학을 전공한 아들은 미국 케이스웨스턴리저브(CWR)대학에서 박사학위(화학)를 받고 지금은 퍼듀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정년퇴임은 했지만 김 전 기사장은 배움의 자세를 잊지 않고 있다.2005년부터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서 동양고전을 공부하는 한편, 사진을 배워 수목원과 식물원을 다니며 촬영에 몰두하고 있다. 배운 것을 나누는 일에도 열심이다. 고려대보건과학대학에서 기사장 직무 전에, 퇴임 후에는 신흥대학에 출강하여 미생물학과 면역학 강의를 했다면서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것임 을 강조했다. 논어의 첫귀절,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을 가슴으로 체득했다고 한다.

글/박현숙 자유기고가 사진/김선재

[인생예찬] 한양대학교의료원의 임직원이 만들어가는 ‘의미’있고 ‘흥미로운’ 삶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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