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져 가는 교정을 따라 오늘도 저는 병원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캠퍼스 곳곳에서 풋풋한 대학 새내기들을 볼 때마다 저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았는데 어언 18년이란 세월을 이 언덕길을 오가며 제 젊은 시절 대부분을 지내 왔음을 상기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어색하고 낯선 환경 속에서 하나하나 새롭게 배워가던 18년 전 신규 간호사의 모습은 이제 한참 어린 후배 간호사들의 모습 속에서 아스라이 떠올려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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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대 근무에 적응하면서 손끝의 미세한 떨림조차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혈관을 찾을 때는 왜 그렇게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던지요. 그때부터 항상 침착하자고 저 자신에게 주문을 걸며 어떤 일에서도 차분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왔습니다. 그렇게 한길을 묵묵히 걸어왔습니다.

주사실로 온 것은 저에게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주사실은 서관 6층의 한 귀퉁이에 화살표를 쫓아 찾아오기도 힘들었던 곳에 있었습니다. 서관 6층의 리모델링을 시작하면서 주사실이 환자분이 찾기 쉬운 곳으로 이전하게 되고 오가는 직원들에게도 편안하고 익숙한 곳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저 또한 리모델링이 진행되면서 관계자들과의 회의에 참석하고, 내부 인테리어를 고민하며, 커튼 색깔을 고르고, CD player를 설치하는 등의 고민을 하면서 주사실에 대한 애정을 키워갔습니다. 마침내 Open식을 치르고 가슴 가득 설렘을 느끼면서, 제가 만들고 꾸민 공간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보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사실 병동에서 근무할 때는 환자, 보호자들만 대하다가 외래라는 전혀 다른 부서에서 환자 대면업무 외에 행정적인 업무, 타부서 직원들과의 협조 요청 등을 해결해 나가야 할 때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많은 에피소드들이 일종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추억일 따름입니다. 아줌마 특유의 기질로 직접 달려 내려가서 떼도 써보고, 안 되면 되게 해달라며 큰 소리도 쳤지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때때로 저 자신도 놀랍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가운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많은 분께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리모델링 이후 주사실은 그야말로 외래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정겹고, 힘들면 쉬어가고 싶고, 어떤 이야기보따리도 풀어놓을 수 있는 쉼터 같은 곳입니다. 간혹 침대가 모자라 미처 눕지 못하셔서 의자에 앉아 주사를 맞으면서도 환하게 웃으시며 침대료라도 빼달라는 농담으로 상황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는 환자에게 알사탕 2개로 애교를 부리며 서운함을 달래기도 합니다.

image생후 6개월 된 귀염둥이 갓난아기에게 주사를 놓을 때는 안쓰러워하시는 아기 부모님의 마음을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헤아리며 최선을 다해 혈관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주사를 맞으면서 하염없는 푸념이나 인생 상담을 늘어놓으시는 어르신들의 고민을 들어 드리며 같이 고민해 보다가 웃음보따리가 풀려 한바탕 웃으면서 그 아픔과 고민을 진심으로 위로해 드리기도 합니다.

병원에 오실 때 마다 꼭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시는 분. 집에서 직접 재배하셔서 모양은 없지만, 무 농약이라며 과일을 싸 들고 오시는 분. 주사는 맞지 않지만,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겠다며 들렀다 가시는 분들. 안 보이면 궁금해하시며 오히려 우리의 안부를 물어 주실 때는 그분들의 가슴 따스함이 그대로 전해져 오곤 한답니다.

웃음과 미소, 따뜻한 말 한마디가 고객의 그늘지고 주름진 삶의 한 자락에 한 움큼의 미소라도 얹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항상 미소와 웃음이 떠나지 않는 푸근한 주사실이 되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친절이란 가식 없는 진실이 우러나는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해 보며 오랜 시간 장작불에 은근히 우려낸 구수한 숭늉 같은 말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뿜어져 오르는 시원한 분수처럼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고 고객들의 마음속 궁금증이나 답답함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착한 간호사가 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오늘은 유난히 외래 항암치료 환자들이 많으셔서 많이 바쁠 것 같습니다.

글/ 김희나 한양대학교병원 주사실 주임간호사

[사랑수첩] 오늘 실천한 사랑이 타인의 내일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믿는 한양대학교의료원 임직원들의 세상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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