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환경과 맞닥뜨린다는 것이 참 불편하고 가급적 피해가고 싶은 일임을 절감하면서도 때로는 그 생경한 문 앞에서 약간의 흥분과 설렘을 느끼게 됩니다.

학부시절 어렵게 용돈을 모아 도이치 그라마폰사의 노란색 라벨이 선명한 라이센스 음반을 구입한 후 비닐 커버를 뜯기 직전에 느꼈던 감정과 흡사한 기분을 요 며칠 경험하면서 새삼스레 지난 28년간의 임상간호사 생활을 반추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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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적인 부서이동으로 지난 5년간 근무했던 11층 외과병동을 떠나 19층 내과병동으로 옮긴 지 한 달 남짓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변화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지내다가 이제야 조금 숨을 돌리고 주변을 돌아봅니다. 내과병동 근무가 처음은 아닌데도 외과병동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아직도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최근에 리노베이션을 마친 병동이라 모든 면에서 한결 깨끗하고 쾌적하지만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고 기존의 문화에 동화되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환경과 맞닥뜨린다는 것이 참 불편하고 가급적 피해가고 싶은 일임을 절감하면서도 때로는 그 생경한 문 앞에서 약간의 흥분과 설렘을 느끼게 됩니다.

학부시절 어렵게 용돈을 모아 도이치 그라마폰사의 노란색 라벨이 선명한 라이센스 음반을 구입한 후 비닐 커버를 뜯기 직전에 느꼈던 감정과 흡사한 기분을 요 며칠 경험하면서 새삼스레 지난 28년간의 임상간호사 생활을 반추해 보았습니다.

입사 초기의 신산스런 기억도 바로 엊그제 일인 양 말갛게 떠오르고 병동에서 조우했던 숱한 환자분들과 보호자분들도 더러 생각납니다. 혈육 같은 끈끈함으로 교대근무의 고단함을 함께 나누던 동료들의 얼굴이 새록새록 그립습니다. 자주 세상의 리듬과 어긋났음에도 우리는 씩씩하게 명동과 대학로의 골목길들을 누비고 다녔지요. 퇴근 후에는 무조건 병원 건물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듯 내달릴 만큼 병원생활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늘 생과 사가 교차하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간호사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보람과 기쁨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간혹 TV 드라마나 매스컴에 어설프고 품위 없이 묘사되는 간호사들의 모습에 분개하여 제대로 된 메디컬 드라마 극본을 쓰겠다는 뜬금없는 바램을 품기도 했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제 자신이 그다지 운이 좋다거나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지만 임상간호사로서 내과병동과 외과병동 및 신경정신과병동을 두루 경험함과 동시에 겸임교수로서 오랜 기간 정신간호학을 강의할 수 있었던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하느님과 세상의 여러 이웃들, 특별히 제가 만났던 환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아직도 문학을 전공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과 열등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으며 저의 은사님들처럼 다시 태어나도 간호사의 길을 가겠다는 소명감 또한 지니지 못한 위인입니다. 그러나 강산이 세 번쯤 변할 정도의 긴 시간 동안 ‘간호’라는 한 길을 걸어온 자로서 이 세상의 수많은 직업 가운데 그래도 일생을 걸어 볼만한, 괜찮은 전문직 중의 하나가 간호사임을 확신합니다.

그런즉 자신의 전 존재로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킨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숭고한 간호정신의 끝자락에 간호에 대한 저의 책임감과 소박한 열정을 기댈 수 있다면 돌보는 자, 가르치는 자로서 크게 부끄러운 삶은 살지 않겠구나 싶습니다. 페인트 냄새가 아직 덜 가신 19층 병동에서 내려다보는 5월의 캠퍼스가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제가 이미 만났거나 앞으로 만나게 될 환자분들께 사도 요한의 말씀에 제 마음을 실어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영혼이 평안하듯이 그대가 모든 면에서 평안하고 또 건강하기를 빕니다.”(요한의 셋째 서간 1,2)

페인트 냄새가 아직 덜 가신 19층 병동에서 내려다보는 5월의 캠퍼스가 눈부시게 아름답습니다.

제가 이미 만났거나 앞으로 만나게 될 환자분들께 사도 요한의 말씀에 제 마음을 실어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의 영혼이 평안하듯이 그대가 모든 면에서 평안하고 또 건강하기를 빕니다.”(요한의 셋째 서간 1,2)

글/ 애정희 한양대학교병원 19층 병동 수간호사

[사랑수첩] 오늘 실천한 사랑이 타인의 내일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믿는 한양대학교의료원 임직원들의 세상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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