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추웠던 지난 1월, 한양대학교병원에서 한 편의 소설 같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초등학교 동창에게 신장을 기증한 사람이 있다는 것. 아무리 벗이 좋다지만 가족도 아닌 친구가, 재산의 일부도 아니고 신체의 일부를 떼어주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적잖이 놀랐다. 이 이야기는 ‘친구를 살리고 싶었던 친구’ 오치남 씨와 ‘친구를 생명의 은인으로 받아들인 친구’ 윤선필 씨의 아름다운 나눔의 기록이다.

오치남씨

50년 만에 재회한 옛 동무

_H4B6052두 사람의 인연은 50여 년 전에 시작됐다. 전북 부안의 작은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던 오치남 씨와 윤선필 씨는 이웃집에 사는 둘도 없는 동무였다. 오 씨의 전학으로 소식이 끊긴 이들이 재회한 건, 지난 2010년. 오치남 씨는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다시 만난 윤선필 씨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한다.
“동창모임 ‘송림회’가 결성되고 얼마 후에 선필이를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깜짝 놀랐지 뭐예요. 이 친구, 한눈에 봐도 병색이 완연했거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만성신부전증으로 생사의 기로에 있다고… 그때부터 선필이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당시 윤 씨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21년 전, 언니에게서 기증받은 신장이 기능을 다해 이미 투석을 시작했고, 그도 여의치 않아 재이식이 불가피한 상태였던 것이다. 오치남 씨가 신장을 기증하기로 결정한 것은 소식을 접하고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심사숙고했지만, 결론은 항상 ‘친구를 살리고 싶다’는 하나의 길로 내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들의 반대는 생각보다 거셌다.
“두 아들의 반대가 심해서 말조차 꺼내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제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내 나이도 이제 황혼을 바라보는데 남은 생에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또 찾아오겠느냐’고, ‘나눔으로 조금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설득하고 또 설득했죠. 그렇게 식구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가족들에겐 윤 씨가 생면부지의 남인데다가, 평소에도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오 씨가 그저 기분대로 쉽게 결정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조금 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시들어가는 친구의 생명을 구하다

_H4B6181“어린 시절, 그땐 어느 집이나 어려웠지만 우리 집은 유독 가난했어요. 끼니도 때우기 어려워 맹물만 마시던 그때 선필이네 집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고구마며 감자, 배추를 들고 와 한 아름 안겨주는 선필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죠.”
동네에서 비교적 크게 농사를 짓던 윤선필 씨의 집은 어려운 오 씨네 사정을 알고 추수한 음식을 기꺼이 나눴다. 시골 살림이 거기서 거기였을 텐데도 따뜻하게 이웃을 품어준 윤씨네의 온정을 오치남 씨는 마음속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다. 그에게 윤 씨는 동무이자 은인이었던 것이다. 그가 제 몸의 일부를 떼어주어도 아깝지 않았던 이유다. 결국 가족들은 오치남 씨의 끈질긴 설득과 두 사람의 사연에 감화하여 신장기증에 동의했다.
“가족의 동의를 얻어낸 것만으로도 저는 이미 선필이를 살렸다는 기쁨에 사로잡혔어요. 만성신부전증으로 23년간 고통 속에 살았던 친구에게 제 신체의 일부가 도움된다면, 그것으로 시들어가는 선필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곧바로 이식절차를 밟았습니다.”
알다시피 장기 기증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오 씨가 기증에 적합한 건강한 신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것이 윤 씨에게 이식할 수 있는 장기여야만 한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그의 신장은 친구에게 꼭 맞았고, 이식수술 또한 성공적이었다.
준비해 온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만약 한쪽만 남은 오치남 씨의 신장에 이상이 생긴다면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그는 햇살같이 웃으며 답했다.
“제게 주어진 남은 인생의 반을 쪼개서라도 선필이와 나누고 싶었어요. 20년 살 거 10년씩. 사이 좋게요.”

글. 백아름 / 사진. 김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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